[세계일보]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한모(18)군에게 어느 날 ‘대박’이 터졌다.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매주 20만∼30만원이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왔다. 고수익을 보장해준다는 말을 믿고 자신 명의 통장을 한 업자에게 넘겼는데, 사실이었다. 통장대여가 불법이란 것을 알았지만 유혹이 너무 달콤했다.
한 달 뒤 한군은 목돈을 만지게 됐다. 이 업자는 한군에게 “퀵서비스를 통해 내가 너에게 통장을 보낼 거야. 입금된 돈을 찾아 네 통장에 다시 입금하면 입금액의 1.5%를 줄게”라고 말했다. 고민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업자가 보낸 ‘카카오톡 문자’가 잇따라 왔다. 한군은 ‘로봇’처럼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면 업자는 한군의 통장에서 잔액의 1.5%를 남기고 돈을 빼내갔다. 한군은 이런 방식으로 7개월 동안 1억원을 챙겼다.
“정말 처음에는 용돈을 조금 벌어보려는 생각이었어요. 불법이라는 걸 알았지만, 돈이 들어오는 재미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지난해 12월 보이스피싱 사기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한군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보이스피싱 사기 조직이 한군처럼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거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청소년과 사회 초년생들을 현금 인출책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기가 적발될 경우 범죄 조직은 종적을 감추고,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 된 이들은 뒤늦게 후회하지만 범죄자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는다.
이런 희생양은 한군뿐만이 아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9일 중국 보이스피싱 사기 조직에 가담해 국내에서 현금 인출·전달 역할을 한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로 강모(29)씨 등 11명을 구속하고 같은 혐의로 김모(19)군 등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이었고, 한군을 비롯한 고교생과 대학생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이들 외에도 10대 2명에 대해 추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 등은 지난해 6월부터 최근까지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출 사기 등을 통해 국내 피해자 2000여명에게서 빼돌린 200억여원을 인출해 중국으로 송금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강씨 등은 통장을 대여해 주고 수수료 명목으로 받은 돈이 3억여원에 이른다.
경찰 조사 결과 중국 조직은 인출책과 국내 알선책을 두고, 수사망을 피해왔다. 국내 알선책은 중국 조직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뒤 퀵서비스를 통해 인출책에게 대포통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찰은 중국 총책에 대해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며, 국내 알선책 등을 쫓고 있다.
서울 은평경찰서는 지난주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연루돼 인출책 등으로 활동한 혐의(사기 등)로 김모(25)씨 등 3명을 구속했고, 서울 동작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도 인출책 역할을 한 20대 6명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