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가계가 '불황형 흑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원금상환 부담 및 전월세 보증금 증가, 미래소득에 대한 불안 및 노후대비 저축수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소득보다 소비가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LG경제연구원이 16일 내놓은 '가계 흑자 계속되지만 소비늘릴 여유는 없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흑자율이 지난해 3분기 27.5%로 통계청이 전국기준 1인 가구를 포함해 집계하기 시작한 2006년 1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계흑자율은 가처분소득 대비 흑자액(가계소득-가계지출) 비중이다.
가계흑자율은 2011년 1분기 21.5%를 저점으로 지속적인 상승하고 있지만, 불황형 흑자라는 분석이다. 가계부채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의 흑자율 상승이 가계의 소득증가율 둔화보다 소비증가율 둔화가 더 빨리 진행된 결과기 때문이다.
가계부채(비영리단체 포함)가 지난해 3분기 1197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가운데, 부채보유 가구는 지난해 3분기 66.9%로 2010년 59.8%보다 확대됐다. 가계의 원금상환 부담이 커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이후 가계의 연평균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4.5%로 1999~2008년의 6.2%보다 1.7%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소비증가율은 같은 기간 5.6%에서 2.7%로 2.9%포인트 급락, 소비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밑도는 현상도 2011년 2분기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10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김건우 선임연구원은 "흑자율이 높아지고 적자가구도 줄어들고 있지만, 가계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원금상환 부담이 커지는 등 소득에 비해 소비 증가세가 더 빠르게 둔화되면서 나타나는 불황형 흑자"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은행권 대출 중 원금상환중인 대출 비중은 2007년 24%에서 2013년 39.6%로 대폭 증가했다. 이는 가계가 원금상환 부담이 큰 대출에 대해 만기를 연장할 때 추가담보를 요구받거나, 신규대출로 대체하면서 분할상환 방식으로 변경된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 선임연구원은 "원금상환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신규 차입도 커지는 등 가계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며 "앞으로도 분할상환 대출 비중이 지속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여 원금상환 부담이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계의 불황형 흑자는 부동산 경기 침체에 따른 영향이 컸다. 집 주인이 전세보증금을 올리거나 월세 등으로 전환하면서, 세입자가 전세주택을 구하지 못해 임대료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전세가구의 연간 가처분소득 대비 전세보증금 비율은 2007년 190%에서 2012년 269%로 급증했다. 보증부월세 가구의 보증금 비율도 43%에서 66%로 크게 상승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전세금 변동분 만큼 신규대출을 받거나 기존 보유자산을 매각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며 "특히 반전세로 전환된 경우 보증금과 월세를 동시에 지출하는 부담이 커졌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소비확대를 기대하기는 힘들뿐더러 더딘 경기회복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소득대비 부채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다, 향후 금리상승시 이자상환부담까지 커질 수 있어서다.
김 선임연구원은 "원금상환부담 및 전월세 보증금 증가, 노후대비 저축의 필요성 등 예산제약 요인이 적지 않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 하는 압력이 지속될 수밖에 없어 소비회복을 통한 경기회복이 느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은퇴가구 비중이 높은 60세 이상 고령층가구와 자영업자가 흑자율 상승을 이끈 것으로 나타났다. 2007~2012년 전체 흑자율이 1.9%포인트 증가에 불과했으나, 고령층 흑자율은 6.0%포인트 올랐다. 같은 기간 자영업자도 18.9%에서 26%로 7.1%포인트 상승해 전체 흑자율을 끌어올렸다.
김 선임연구원은 "고령층 가구가 소비보다 저축을 우선하는 현상은 이례적"이라며 "노후대비를 부동산에 의존해 오면서 미래소득에 대한 불안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 "자영업자들이 내수부진이 길어지고 경기회복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비를 줄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반면 20대 가구 흑자율은 2007년 27.8%에서 2012년 17.4%로 급락했다. 30대 가구도 26.5%에서 25.5%로 하락했다. 이는 청년층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경제적 자립이 힘들어져 부모 가구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청년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